“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가버나움에 한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매우 소중한 종’이 있었는데, 그 종이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유대인 장로들에게 부탁하여 자기 종을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
백부장의 행동은 사려 깊은 것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예수님이 능력 있는 분임을 신뢰했고, 그분의 호의를 얻기 위해 유대인에게 치유를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호의가 유대인을 통해 온다는 유대인의 자부심을 존중한 것이지요. 또한 그는 유대인인 예수님이 이방인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 직접 만나 뵈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완고한 유대인의 경우 비유대인과의 교류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에 비유대인인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간다면 혹시라도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까 봐 염려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가 지역의 유대인 장로들에게 부탁하고, 또 장로들이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점을 주목해봅시다. 이는 백부장이 유대인의 신앙을 잘 이해했으며 그 신앙에 적지 않게 동의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청을 들어려주고 그의 집 가까이 가셨을 때 그는 친구들을 보내어 이렇게 아룁니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 주십시오.”(눅7:6-7절)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유대인은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유별나고 까다롭고 또 근거 없이 자부심만 높다고 여겨졌죠. 그러나 그런 평판이나 인종에 대한 편견, 선입관의 벽에 갇혔다면 백부장은 예수님을 향해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백부장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과 비유대인 모두에게 임했음을 믿었고, 나아가 그것이 유대인을 통해 이뤄졌음을 겸허히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을 듣고는 주변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이로써 유대인과 비유대인,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의 벽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 그리고 백부장의 믿음과 겸손이 만나는 곳에 인종이나 문화의 벽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종과 문화를 넘어섭니다. 우리의 신앙은 고정관념, 편견, 차별을 넘어서는 능력과 사랑과 맏음과 겸손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이 치우신 차별의 벽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다시 세우고 있지는 않은가요? 벽을 헐어 평화를 몸소 세우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전히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같이 하는 기도>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라고 찬송하면서도 우리는 날마다 벽을 다시 세웁니다. 그 벽은 두려움과 공포 혹은 빈곤 때문에 세워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평화이신 주님이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는 능력의 주님이요. 빈곤을 해결하시는 풍성한 은혜의 주님임을 고백합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간절히 간구하오니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