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중요하게 여긴 결정적인 이유는 그곳에 유대교의 신전, 흔히 말하는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하나님이 머무신다고 믿었지요. 하나님이 머무시기에 성전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고, 그것이 예루살렘에 있으니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접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는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라면, 하나님을 완전히 보여주고 하나님과 사람을 중재하는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보다 더 큰 성전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나아가며 그분을 만납니다. 완전한 성전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도리어 하나님을 가려버리거나 왜곡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막11:15-16절) 금하셨습니다. 이것을 두고 성전 청결 사건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사실 성전을 청결하게 한 정도가 아니라 철폐 혹은 철거하는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근본적으로는 성전에서의 제사를 금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참된 방식은 제사가 아니라 ‘기도’입니다. 기도는 자기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내보이며 그분의 뜻을 모시는 경건 행위이지요. 진실한 기도 대신 돈으로 제물을 사서 바치는 것은 얼마나 ‘쉽고 간단한’일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니 얼마나 간편한가요.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인간의 타락한 모습이고 이를 유지시키는 것이 종교제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한 제사 행위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다고 규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무리는 그분의 가르침에 놀라워했지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곧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전락시켜 권력과 이득을 취하던 이들은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앞에는 참된 성전과 더불어 사는 삶과 성전의 모사품을 즐기는 삶이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같이 하는 기도> 주님, 우리는 주님을 우상으로 대체하고는 안심합니다. 주님이 임하시는 성전을 성전 모조품으로 바꾸어놓고는 만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고, 상상으로 만들어낸 그리스도와 평안하게 지냅니다. 주님,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셔서 그 위엄과 엄위를 깨닫게 하소서. 우리 삶 한복판에 진리를 비추사 자기만으로 만들어낸 평화를 거둬내소서.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려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