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주간의 삶 나누기
2. 조용한 기도로 속회예배를 시작합니다.
3. 찬송 - 570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4. 기도 - 맡은이
5. 말씀읽기 - 마가복음 7:24-30절(신약 66페이지)
6. 말씀 나누기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 나라 말에 그 아버지의 그 자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좋은 의미로 쓰여 질 때도 있지만, 나쁜 의미로 쓰여질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아이 뒤에는 문제가 있는 부모님이 있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은 자식이 잘 못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식이 부모 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많은 가르침을 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는데, 이것이 혹 관심이 아니라
간섭은 아닌가, 혹 애정이 아니라 집착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렇겠지만, 자녀를
양육하면서 그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지나친 간섭을 통해 마치 내
자식을 내 소유물처럼 여기며 집착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무 관심해서 자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
잘못된 길의 시작은 바로 부모인 우리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살면 살수록 놀라는 것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는데 아빠 엄마의
말투와 행동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한 어머니가 어린 딸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본문 25절에
의하면 ‘더러운 귀신 들린(possessed by an evil
spirit)’ 딸이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이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달라고 예수님께 찾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어머니는 딸을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정작 치료받아야 할 딸을 데려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와 예수님이 몇 마디
대화를 하고서 예수님은 본문 29절에서 이 어머니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그리고
나서 본문 30절에 의하면 이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있고 귀신은 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이상한 일입니다. 딸도 데려오지
않고 몇 마디 나누었는데 이 어머니의 말만 듣고 예수님은 이 딸을 고쳤습니다. 다시 말씀 드려 아픈
딸과 관계없이 고쳤다는 사실입니다. .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이 딸이 회개했다는 말도 없고, 이 딸이 깨우쳤다는 말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 딸은 멀리 있는 집에 있었기에 놀라운 사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이 딸이 더러운 귀신들린 것의 원인이 바로 어머니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어머니의 말만으로 딸이 나았다는 뜻입니다. 원인은 어머니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 고침의 시작도 어머니에게 달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어머니의 말만으로
고쳤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29절 “이 말을 하였으니”에서 ‘이 말’은 희랍어로 λόγος(로고스)라고 합니다. λόγος(로고스)라는 말은
그냥 말이 아닙니다. 이 어머니의 생각이요, 의지요, 뜻입니다. 이 어머니의 생각, 의지, 뜻이 바로 세워졌기에 그 딸도 치유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상 이 치유는 예수님이 한 것이 아니라 이 어머니가 한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그럼 이
어머니가 한 말은 무엇인가가 중요해 집니다. 어머니가 이 말을 했기 때문에 귀신이 네 딸에서게 나갔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어머니가 한 말은 바로 겸손과 인내와 믿음들이 조화 된 말들이고, 이것이 이 어머니의 믿음으로 인정되었기에 그녀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본문 25절에 의하면 이 딸은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입니다. 희랍어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그녀의 딸이 더러운 영 혹은 마음을 가졌다.”입니다. 제가 희랍어 원문을 들어 이 번역을 다시
한 것은 그냥 귀신들렸다고 하면 이 딸을 정신병자 정도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정신병이라면
그냥 귀신들렸다고 해도 될 것인데, 굳이 ‘더러운 귀신’이라고 ‘더러운’이라는
말을 추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더러운’이라는 의미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전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마가복음 7장 21-23절의
말씀입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여기에
있는 악한 마음의 항목은 더러운 귀신이 들린 딸 안에 가지고 있는 더러운 마음들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렇게 딸이 더러운 마음을 갖게 된 것이 이 어머니가 바로
이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딸에에게 이 마음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26절에서 이 어머니를 소개합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이 말은 단지 이 여자의 출신 성분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어머니가 헬라인이라는 말은 당시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고 있는 문화가 헬레니즘 문화 였기에 이 여인이 헬레니즘
문화에 익숙한 대단한 상류층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한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수로에 속한 보니게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수로는 ‘시리아’를 가리키는 것이고, 보니게는 ‘페니키아’지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화려했던 시리아 제국의 왕조인 페니키아인의 후예라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정리하면 이 여인은 상류층이며, 옛 왕조의 자손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는 도도하고 교만한
여인임을 밝히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류층 귀족의 도도한 여인이 로마의 식민지인 갈릴리 출신의
천하디 천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찾아온 것 만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본문 25절 후반부가 말하듯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딸을 고쳐 줄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매정하게 개
취급을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왜 예수님은 예수님답지 않게 이 여인에게 이런 모욕적인 대접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겁니다. 이 말은 분명 이 여인을 시험하는 말입니다.
본문 25절 후반부에서 이 여인이 찾아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여기 ‘엎드리다’라는 말은 희랍어로προσπίπτω(프로피프토)입니다. 이
말은 ‘예배하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배의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바로 그 예배입니다. 예배란 엎드려 간구하는
절실한 자세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올 때 정말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듣는다 하더라도 더러운 마음을 씻고자하는 마음이 절실한지 물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와
기도는 절실함입니다. 절실한 엎드림이고, 절실한 간청입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 아니라 내가 거룩해지려는, 깨끗해지려는 절실함이
바로 예배이고 기도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 자녀가 이 험한 세상에서 바르고 곧게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하면, 우리 욕심으로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자녀가 거룩해지도록 키워야 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 자신이 바로 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고 예배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결단코 잊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 헌금 - 383장(눈을 들어 산을 보니)
8. 중보기도
(1)
가정의 달, 부모님과 자녀들 앞에 깨끗하고 바른 절실한 마음을 위해
(2)
무더워 가는 날씨에 건강을 위해
(3)
긴 방학을 앞둔 자녀들과 한국 여행을 계획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9. 주기도문 -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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